울진 평해황씨 해월종택 울진 기성면 문화,유적
가을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오던 오후, 울진 기성면의 평해황씨 해월종택을 찾았습니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낮은 기와지붕들이 이어지고, 골목 사이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렸습니다. 돌담길을 따라 걸어가면 오랜 세월을 견딘 한옥 한 채가 고요히 서 있습니다. 바로 해월 황윤길 선생의 종택입니다. 기와의 선이 부드럽고, 처마 아래에는 세월이 새겨 놓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나무 특유의 향과 함께 따뜻한 바람이 스쳤습니다. 바닥의 나무는 반들거리고,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를 향해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집이 품은 무게와 품격이 느껴졌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고, 고요한 한옥의 숨결이 천천히 전해졌습니다.
1. 바닷바람을 따라 찾아가는 길
해월종택은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에 ‘평해황씨 해월종택’을 입력하면 해안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길 끝에서 마을 입구로 안내됩니다. 주차는 종택 앞 공터나 마을회관 옆에 가능하며, 도보로 3분 정도 걸으면 담장 너머로 종택의 지붕이 보입니다. 길은 평탄하고, 주변에는 낮은 돌담과 대나무가 늘어서 있습니다. 바닷가 마을 특유의 짠내 섞인 바람이 불어와 공기가 한층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인사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닭 울음이 고요한 풍경에 생기를 더했습니다. 종택으로 향하는 길에는 ‘해월종택’이라 새겨진 돌비가 세워져 있어 찾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도시와는 전혀 다른 속도의 하루가 이곳에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2. 정갈하게 보존된 한옥의 구성
해월종택의 첫인상은 단정함이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 별당이 ㄷ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으며, 건물마다 기단이 높아 비와 바람을 막기 좋게 지어졌습니다. 사랑채는 손님을 맞이하던 공간으로, 마루에 앉으면 바람이 기둥 사이를 지나가며 집 안을 가볍게 감쌉니다. 안채는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낮은 창을 통해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왔습니다. 지붕의 곡선은 완만하고, 서까래와 기둥의 연결부에는 옛 목수의 손길이 섬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줄지어 서 있고, 담장 너머로는 산이 가까이 보입니다. 바람이 불면 항아리 뚜껑이 살짝 울리며 낮은 소리를 냈습니다. 오래된 집이지만 불편함보다 여유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한옥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3. 해월 황윤길 선생과 종택의 역사
해월종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해월 황윤길(黃允吉, 1536~1608)의 종택으로, 약 400년의 역사를 지닌 고택입니다. 황윤길 선생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조정에 보고했던 인물로, 통찰력과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호 ‘해월(海月)’은 바다의 달처럼 맑고 깊은 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종택은 선생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보존해온 공간으로, 안채와 사랑채, 사당, 별묘가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습니다. 사당에는 해월 선생과 후손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봄과 가을로 제향이 올려집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역사적 가치뿐 아니라 조선 중기 양반가옥의 구조와 생활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입니다.
4. 세심하게 이어진 보존의 손길
해월종택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았습니다. 마당의 돌계단은 반들거리고, 지붕의 기와는 정기적으로 손질되어 있었습니다. 집 안 곳곳에는 옛 가구와 생활 도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장롱의 문살 하나에도 정교한 세공이 느껴졌습니다. 안채의 대청마루 바닥은 윤이 나도록 닦여 있었고, 방문에는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얇은 한지가 덧대어져 있었습니다. 담장 안쪽에는 후손들이 가꾼 화초가 줄지어 피어 있었고, 향이 은은하게 퍼졌습니다. 안내문과 표지판은 최소한으로 설치되어 있어 전통가옥의 미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지금도 후손들이 제향을 이어가며 삶의 일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특별했습니다. 살아 있는 유산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공간이었습니다.
5. 주변의 역사와 풍경을 함께 느끼기
해월종택을 관람한 뒤에는 차로 10분 거리의 ‘운암서원’을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두 곳 모두 평해황씨 가문의 역사와 유교적 전통이 이어지는 공간입니다. 또한 인근의 ‘불영사계곡’은 자연이 잘 보존된 명소로, 푸른 계류와 단풍이 어우러져 사계절 모두 아름답습니다. 점심시간에는 기성면 중심의 ‘울진대게마을’에서 대게 정식이나 물회 한 그릇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후에는 해안도로를 따라 ‘기성해수욕장’까지 이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고택의 고요함과 해안의 청량함이 교차하는 하루는 울진의 매력을 가장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줍니다. 해월종택을 중심으로 한 이 여정은 문화와 풍경이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코스였습니다.
6. 방문 팁과 유의사항
해월종택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되며, 입장료는 없습니다. 마을 중심에 위치해 주차 공간이 많지 않으므로, 주말에는 마을 입구 공터를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부 전각 중 일부는 후손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므로 관람 시 조용히 이동해야 합니다. 비 오는 날에는 돌바닥이 미끄럽기 때문에 운동화를 신는 것이 좋고, 여름에는 해안가 특유의 습기로 인해 모자와 물을 챙기는 편이 좋습니다. 사진 촬영은 가능하지만, 제향 공간에서는 삼가야 합니다. 오후 햇살이 담장 위로 비칠 무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시간대에는 지붕의 곡선이 더욱 부드럽게 드러나고, 마당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종택의 깊은 분위기가 완성됩니다. 조용히 걸으며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방문이 됩니다.
마무리
평해황씨 해월종택은 단순한 옛집이 아니라, 세월과 정신이 함께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습니다. 나무 기둥 하나, 창호의 무늬 하나에도 오랜 시간의 품격이 스며 있었습니다. 바닷바람이 담장을 넘어오고, 햇살이 마루를 비출 때마다 집 전체가 호흡하듯 움직였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절제와 품위가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시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집이 품고 있는 온기가 천천히 전해졌습니다. 해월 황윤길 선생의 강직한 정신이 이 공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다시 울진을 찾게 된다면 봄비 내린 뒤, 촉촉한 바람과 함께 이곳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해월종택은 울진의 역사와 인간의 온기가 함께 깃든 가장 조용한 문화유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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